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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이야기

뒤를 돌아보지 말자.

부로(富老, Bro) 2022. 1. 18. 06:35

며칠 전에 허지웅님 칼럼을 읽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내용을 만화로 각색한 것이었는데 글자만 있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에게 양보하느라 후진을 했는데 미처 장애물을 보지 못해서 차를 긁었다는 내용이었다. 왜 내가 양보했을까, 왜 뒤를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았을까, 책을 사러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원인을 찾아 고민할수록 괴로웠다고 하였다.

 

해결책은 그 일은 원래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고 치우는 것이다. 원인을 찾으려 해보아야 찾을 수도 없고 나만 손해라는 것이다. 사람이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고 차는 고치면 그만이라며 만화는 끝났다.

 

나는 좀 놀랐다. 최근에 읽었던 자존감 수업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잘못된 일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오늘 상사에게 꾸중을 들은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일을 잘못한 걸까? 나는 한다고 했는데 왜 맨날 혼나기만 할까? 나는 이 일을 하면 안 되는 운명인데 이 일을 하고 있나? 그래서 그런가? 나는 왜 이일을 시작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놀랍도록 비슷했다.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도 비슷했다. 잊어버려라. 어차피 일어난 일을 고민해봐야 소용없다. 반성을 하되 짧게 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마운드에 오른 류현진 선수의 표정은 진지하다. 평소에 보이는 웃음기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심각하지도 않다. 장난과 심각 사이의 어딘가에서 그는 경기 내내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홈런을 맞았을 때도 그렇다.

 

프로 선수들은 타자의 타격음을 듣기만 해도, 심지어 손에서 공이 떠난 순간 실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홈런이 나올 수 있음을 직감한다고 한다. 류현진 선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볼 때도 혹시 잡혔는지 확인하는 정도이다. 예상대로 홈런이 되더라도 씨익 한번 웃고 만다. 다음 타자가 나올 때까지 연습투구를 이어간다.

 

나 같으면 계속 돌아보고, 결과를 확인하면 기분이 좋지 않아지고, 얼굴색이 변하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내가 왜 그 공을 던졌을까. 왜 싸인을 그렇게 냈을까. 혹시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상대팀이 싸인을 훔쳤나? 공에 뭘 발라 놓은 것은 아닐까? 이 친구 장타자도 아닌데 어떻게 홈런을 때렸지? 방망이 속에 뭘 집어 넣었나? 가슴은 점점 답답해지고 다음 타자가 벌써 타석에 들어섰는데도 무슨 공을 던져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지금이 몇 회인지, 경기 상황이 어떠한지, 앞으로 경기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생각조차 부담스럽다. 그래서 내가 메이저리거가 못 되나 보다.

 

야구는 멘탈경기라고 한다. 끊임없이 동적인 스포츠가 아니라 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머리가 일을 하는데, 평소에 어떤 생각을 주로 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이때 생각을 잘 가다듬지 않으면 곧 이어지는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연습할 때 잘 되던 것도 지금 되지 않는 것은, 연습 때 하지 않던 생각을 조금 전에 하였고 아직 찌꺼기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뒤를 돌아보지 말자. 지금 맞은 것은 잊어버리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자. 아직 타자를 더 아웃시켜야 이번 이닝이 마무리되고, 이번 이닝이 끝나야 우리 팀의 공격기회가 다시 돌아온다. 우리 팀의 타자들을 믿고 평소에 연습하던 대로 던지자. 진리는 우리의 삶 곳곳에 숨어 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듯이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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