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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이야기

농군 패션

부로(富老, Bro) 2021. 12. 2. 08:34

나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기 때문이다. 살짝 젖는 것은 견딜 만하지만 양말까지 축축한 상태로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타기는 정말이지 끔찍하다. 걸레가 발을 싸고 있는데 도망갈 수 없는 기분이랄까.

 

신발을 살 때 두 가지를 확인한다. 발볼과 방수여부다. 이제껏 여러 가지 ‘Waterproof’신발을 시도했지만 비가 조금만 많이 온다 싶으면 전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럴 때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아예 슬리퍼나 샌들을 신어서 나를 내던지거나 장화를 신어서 나를 밀폐하거나. 문제는 둘 다 한국 남자 회사원이 신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한명은 있는지. 구두 같은 장화를 샀다. 발목도 낮고 검은색이고 신고 벗기 편하게 발목 뒷부분에 손잡이도 있다. 비가 꽤 오는데 뽀송뽀송한 발이 다시 신 밖으로 나왔다. 좋았다. 그런데.

 

발은 당연히 젖지 않았지만 바지가 젖었다. 흠뻑 젖었다. 발이 멀쩡해도 종아리가 축축하니 기분이 나쁜 것은 매한가지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옆에 지나가는 비슷한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양말 속에 바지를 넣고 양말을 쭉 올려 신었다. 신발보다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거구나. 근데 저거 어디서 봤는데.

 

농군 패션이라는 말이 있다. 야구 선수들이 양말을 무릎 밑 까지 올려 신는 것을 말한다. 마치 논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농부 패션이 아니고 농군 패션인지는 모르겠다. 영어로는 ‘high socks’라고 하고 초창기 야구 선수들은 이런 차림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는 베이브루스나 루게릭 같은 선수들도 확실히 농군이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바지가 길어져 오늘날처럼 신발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긴 바지가 일반적인 요즘도 농군 패션을 선호하는 선수들이 있다. 빠른 선수들, 이를테면 두산 정수빈, 두산 박해민 등이 그들이다. 움직이기 편해서 그렇다고 한다. 외국인 선수 중에 LG 윌슨도 기억난다. 보통 하체에 자신 없는 선수들은 싫어한다고 한다.

 

일부러 농군 패션을 할 때도 있다. 팀이나 개인의 성적이 부진할 때 주변 환기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양말을 추켜 신고 팽팽한 종아리를 느끼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2군 선수들이 농군 패션을 주로 한다고 하니, 2군 시절의 힘든 기억을 떠올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국야구만의 특징이 있다면 농군 패션으로도 성적이 나지 않을 경우 그 다음 단계로 삭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삭발로 바로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도 농군 패션을 하니 왠지 쑥스럽지만 비를 헤치고 집에 가겠다는 결연함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기세 좋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그라운드가 아니라 회사 밖으로 나섰다. 그래 이거야.

 

집에 도착 했을 때 나의 아랫도리는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축축하였다. 양말 속에 구겨 넣은 바지 밑단은 무사하였다. 겨우 바지 밑단 살리려고 이랬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나의 결기가 부족한 것일까? 삭발하면 웃길 텐데. 나는 아무래도 돔구장에서 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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