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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가 되는 상상을 한 적 있다. 만원 관중 앞에서 세계에서 제일 잘 친다는 선수들과 겨루고, 밤잠을 설쳐가며 응원하는 고국 팬들의 성원을 받는 일은 상상만으로 짜릿하다. 세월이 흐르고 새벽잠이 줄어 꿈도 줄어들 무렵 메이저리거의 꿈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우습게도 내가 만약 야구선수면 2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프로야구 2군과 미국야구 마이너리그는 기본 성격은 같으나 약간 차이도 있다. 팀이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유망주 선수들이 1군 무대를 목표로 기량을 연마하는 터전이라는 점이 같다. 다만 한국프로야구 2군은 컨디션 난조에 빠진 1군 선수가 잠시 숨을 고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아무리 성적이 나지 않아도 메이저리그 선수가 마이너리그로 가지 않는 미국야구와 다른 면이다. 미국에는 아예 계약 조건으로 명시하기도 하나, 한국에서는 아무리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 선수라도 못하면 2군으로 내리라는 팬들의 성화를 받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1군 소속이 잠시 2군에 머무는 것과 원 소속이 2군인 선수의 대접은 다르다. 한국에서도 고액 연봉자가 2군에 왔다고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 절대로 무리할 수는 없다. 쉬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감을 다시 잡는 것이 두 번째 목표이다. 하지만 2군 선수들은 여기서 밀리면 야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절박함이 있으니, 설렁설렁 할 수 없다. 자신들과 잠깐 동행하는 1군 선수를 부러워하면서 자신들도 저런 선수가 되고 싶다는 자극을 받을 것이다.
내가 2군으로 가고 싶다는 것은 나도 1군 소속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월급을 받고 4대 보험을 내고 있으니 서류상으로 1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성적이 영 시원치 않다. 상사에게 혼나고 주변 동기들에게 치이고 후임들에게 추월당하고. 항상 타석에 서는데 방망이는 여전히 허공을 가르고 있고, 마운드에 올라도 상대 타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타석에서 공은 탁구공처럼 보이고, 마운드에서는 도무지 던질 곳이 없다.
이쯤 되니 아침에 일어나 경기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팀이 승리하면 기쁘고 거기 어울리는 것은 즐거우나 어느새 개인 성적표를 받기가 두렵다. 감독님이나 코치님 말고 특별히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으나 팀 동료들이 마치 뒤에서 수군수군 하는 것 같다.
2군에 가고 싶다. 2군에 가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다. 좋았던 때의 폼을 되찾고 싶다.
배부른 소리다. 1군 복귀의 약속을 받고 2군에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선수는 급이 있고 나는 급 자체가 안 될 수도 있다.
2군이 아니라 잠시 야구를 접어야 하나. 야구를 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야 하나. 나는 단지 밥을 먹기 위해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남들이 다들 야구를 하니까 좋아보여서 하는 것인가.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더라도 야구를 하긴 할 것인가. 야구를 하지 않으면 그럼 무얼 할 것인가. 아니 잠깐. 그동안 나는 야구를 후회 없이 해보긴 한 것인가.
2군 선수 관련 다큐멘터리나 뉴스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자신이 부끄럽다. 내일은 내일의 경기가 열리고 나의 성적이 누적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떠밀려 간다.
